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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마리아 – 여성 항일운동의 선구자, 조직과 교육으로 싸우다

by 카테테 2025. 4. 1.

 일제강점기 동안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여전히 제약적이었지만, 그 속에서도 나라를 되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싸운 여성들이 있었다. 그 중심에 선 인물 중 하나가 바로 김마리아이다. 그는 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키우고, 조직을 통해 여성들을 독립운동의 주체로 세웠으며, 고문과 투옥의 위협 속에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이번 글에서는 김마리아의 생애를 중심으로, 그녀가 어떻게 여성 독립운동의 길을 개척했는지,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그 정신을 어떻게 계승해야 할지를 되짚어본다.

 

김마리아 – 여성 항일운동의 선구자, 조직과 교육으로 싸우다
김마리아 – 여성 항일운동의 선구자, 조직과 교육으로 싸우다

 

 

1. 지식과 신앙으로 무장한 청년

 김마리아는 1891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났다.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교육의 중요성을 체감하며 자랐고,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고등교육을 받았다. 1910년대 초, 서울의 진명여학교와 이화학당을 거쳐 미국 웨슬리안여자대학에 유학하여 생물학을 전공하며 학문적 식견을 넓혀갔다. 이 시기, 그녀는 단순한 유학생이 아닌 민족의식을 품은 지식인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해외에서 바라본 조국의 현실은 그녀에게 더욱 큰 책임감을 심어주었다. 미국 유학생 시절, 대한여자애국단과 같은 항일 단체에서 활동하며 여성의 역할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그녀는 교육이야말로 독립운동의 핵심이라는 믿음을 품고 귀국을 결심했고, 조국에 돌아온 후 여성의 조직적 저항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2.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결성 – 여성 독립운동의 제도화

 1919년, 3·1운동 이후 전국적으로 독립운동 열기가 높아졌을 때 김마리아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했다. 이는 여성 독립운동 조직으로서는 최대 규모였고, 전국적으로 분회를 둘 만큼 체계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그녀는 여성들이 단순한 보조적 역할이 아닌, 실질적인 독립운동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 아래 조직을 이끌었다. 애국부인회는 단순한 시위 참여를 넘어서, 독립운동 자금 조달, 정보 전달, 부상자 치료, 독립군 지원 등의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김마리아는 이 조직을 통해 다양한 계층의 여성들을 하나로 묶는 데 성공했으며, 그 결과 여성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는 데도 기여했다. 그녀의 리더십은 당시 남성 중심의 독립운동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고, 임시정부에서도 그 활동을 주목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의 활동은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1919년 11월, 일제 경찰에 체포된 김마리아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잔혹한 고문을 당한다. 이후 6개월 이상 옥고를 치르며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지만, 조직의 배신이나 회유에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출옥 후 건강은 악화되었지만, 그녀는 결코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3. 교육과 독립, 두 길을 하나로 잇다

 김마리아는 옥고에서 풀려난 뒤 건강을 회복하자 곧바로 다시 독립운동에 나섰다. 특히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에 집중하게 되는데, 이는 그녀가 평생에 걸쳐 가장 중요하게 여긴 과업이었다. 그는 서울과 평양 등지에서 여성 교육과 민족교육에 힘썼으며, 여성들이 민족운동에 동참할 수 있는 교육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헌신했다. 그녀는 교육을 단순히 글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깨우는 일'이라 정의했다. 여성들이 자각하고 민족의식과 사회참여 의지를 갖추도록 이끄는 교육이야말로 진정한 독립운동이라 믿은 것이다. 그녀가 강조한 ‘의식화된 여성 시민’의 육성은 오늘날 민주 시민 교육의 맥락에서도 유효한 관점으로 평가된다. 해방 이후에도 그녀는 민족운동가로서 활동을 계속했으며, 한민당 활동과 여성계 지도자로서의 사회참여를 이어갔다. 1948년 제헌국회의 여성 의원 후보로도 나섰으나 낙선했고, 이후 건강 악화로 점차 활동을 줄여나갔다. 1944년 3월, 긴 투병 끝에 별세했으며, 그의 삶은 여성 독립운동가로서의 불꽃 같은 여정으로 기억되고 있다.

 

4. 지금 우리가 기억해야 할 김마리아의 이름

 김마리아는 무기를 든 의열투쟁가는 아니었지만, 여성의 손으로 조직을 만들고 민중을 움직인 사상가이자 실천가였다. 그녀가 보여준 조직력, 정치적 통찰, 그리고 교육에 대한 헌신은 당시 남성 중심의 독립운동의 흐름에서 매우 독보적인 것이었다. 무엇보다 여성들도 독립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실례를 남겼다는 점에서 그녀의 삶은 더욱 큰 의미를 가진다. 그녀의 활동은 지금의 여성 인권, 교육의 평등, 시민의식 등 다양한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단지 조국을 되찾기 위한 운동이 아니라,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투쟁이었다는 점에서, 김마리아의 삶은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우리는 지금도 다양한 불평등과 차별 속에서 '진정한 독립'을 논하고 있다. 김마리아의 삶은 그 해답을 역사 속에서 보여주는 길잡이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단지 위인을 기리는 일이 아니라, 오늘의 사회를 되돌아보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발걸음이 되어야 한다.